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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브 생 로랑, 20세기 레전드 디자이너

by SunFree 2021. 7.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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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션은 사라지지만 스타일은 영원하다
- 이브 생 로랑 -


출처 : https://m.cafe.daum.net/ok1221/9Zdf/1598641?svc=topRank

 패션계에서 수많은 최초를 남긴 천재 디자이너, 이브 생 로랑. 그의 디자인은 혁명이었습니다. 이 천재 디자이너는 1936년 프랑스령 북아프리카 알제리의 '오랑'에서 태어납니다. 부유한 집안에서 자라면서 어릴때부터 무대의상과 공연도 많이 보았습니다. 때문에 자연스럽게 패션에 관심을 갖게 되었습니다. 이브 생 로랑은 17세부터 패션대회에 참가하는데, 우수한 성적으로 입상을 하게됩니다. 당시 심사위원들이 디올, 지방시, 발망이었습니다. 천재적인 재능으로 관심을 받아오던 이브 생 로랑은 2명의 귀인을 만나게 됩니다. 파리 보그의 편집장 '브뤼노프'와 '크리스티앙 디올'입니다.




출처 : https://m.cafe.daum.net/ok1221/9Zdf/1598641?svc=topRank

 아버지의 소개로 브뤼노프를 알게되고, 이브 생 로랑의 디자인을 본 브뤼노프가 디올에게 소개해줍니다. 디올이 비공개로 보여줬던 디자인과 이브 생 로랑의 디자인이 너무 비슷했기 때문이죠. 당대 최고의 디자이너 디올의 감각을 이제 갓 패션계에 입문한 이브 생 로랑도 캐치하고 있었던 겁니다. 그렇게 만난 디올과 이브 생 로랑. 디올 역시 이브 생 로랑의 재능을 높게 평가합니다. 19살의 이브 생 로랑을 자신의 어시스턴트로 고용해버리죠. 디올과 이브 생 로랑은 호흡이 참 잘 맞았다고 합니다. 이렇게 둘의 호흡이 잘 맞으니 브랜드 디올도 더욱 발전하고 잘 나가게 됩니다. 하지만 이렇게 둘이 만난지 2년만에 크리스티앙 디올이 심장마비로 사망하게 됩니다. 디올이 52세, 이브 생 로랑이 21세 때 였습니다.

 

 

 

 

 당시 디올은 잘 나갔던 브랜드였습니다. 프랑스 오뜨 꾸뛰르 전체 매출의 절반 정도를 디올이 차지했고, 직원만 1,400명에 달했습니다. 이 큰 회사의 후계자로 21세의 이브 생 로랑이 낙점됩니다. 그는 디올에서 그의 첫 번째 컬렉션인 '트라페즈'를 선보이고 대성공을 거둡니다. 아주 성공적인 시작었죠. 하지만 이후 이브 생 로랑의 인기는 점점 떨어져 갑니다. 이유는 디올의 주고객인 고소득층을 위한 디자인이 아니라, 젊은세대의 영향을 받은 파격적인 디자인을 내놓았기 때문입니다. 보수적인 디올의 고객들에게 팔리지 않는 옷이었죠.



 

출처 : https://hygall.com/265838653

 이 즈음 이브 생 로랑은 군입대를 합니다. 그리고 신경쇠약으로 병원에 입원을 합니다. 엎친데 덮친데 격으로 디올에서도 쫓겨납니다. 하지만 이브 생 로랑은 여기서 좌절하지 않고, 독자 브랜드를 런칭합니다. 그리고 독자 브랜드 '입생로랑'의 첫 컬렉션은 대성공과 극찬을 받게 됩니다.

 

 

"샤넬 이후 최고로 아름다운 컬렉션이다"

"디올의 황태자가 드디어 왕좌에 올랐다" 

 

 

 

 

출처 : https://1ofmm.tistory.com/33

 이후로의 행보도 거침 없는데, 해군 코트에서 착안한 여성용 코트, 몬드리안을 오마주한 드레스, 팝아트를 오마주한 드레스도 선보입니다. 그리고 시스루 디자인, 사하라 디자인(사파리 재킷)을 내놓으면서 연달아 성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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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https://m.cafe.daum.net/ok1221/9Zdf/1598641?svc=topRank

 이미 엄청난 성공을 한 이브 생 로랑이었지만, 여기서 한 번 더 도약을 하게되는데, 바로 '기성복'입니다. 이 당시 사회는 점점 더 풍요로워지고, 평범한 여성들도 패션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던 시기였습니다. 1966년에 자신의 이름을 내건 기성복 브랜드 '생로랑 리브고슈'를 런칭합니다.오뜨 꾸뛰르 출신 디자이너로는 처음있는 일이었습니다. 비싼 맞춤제작 옷이 아니라, 사이즈만 맞으면 누구나 입을 수 있는 옷을, 천재 디자이너가 내놓은 것이죠. 엄청난 대중의 수요가 있었고 다시 한 번 대성공을 거두게 됩니다.



 

출처 : https://m.blog.naver.com/p_tailor/221189408281

 그리고 같은해에 또 한 번의 놀라운 시도를 하는데, '여성용 턱시도(Le Smoking)'를 발표한 것입니다. 이전까지 없던 '여성용 바지 정장'을 만든 겁니다. 이 여성 턱시도가 오뜨 꾸뛰르에서는 단 1벌만 팔리지만, 기성복 생로랑 리브고슈에서는 대히트를 칩니다. 이 여성 턱시도를 보고 이렇게들 말합니다.샤넬은 여성들이 활동하기 편한옷을 디자인하였고, '샤넬은 여성들에게 자유를 주었다'. 이브 생 로랑은 여성 턱시도를 디자인하였고, '이브 생 로랑은 여성들에게 권력을 주었다'



 

출처 : 출처 : https://m.blog.naver.com/p_tailor/221189408281

 하지만 브랜드가 커지면서 위기도 찾아옵니다. 기성복, 화장품 등에서 연이은 성공을 거두면서, 라이센스를 남발하게 됩니다. 여기저기서 이브 생 로랑의 로고를 붙인 상품들이 쏟아지니, 브랜드 가치가 바닥으로 떨어진거죠. 그러던 중에 1980년대 부터는 일본 매출이 폭락하게 됩니다. 플라자 합의 이후 일본의 경제가 추락하면서, 버블이 터지던 시기였지요. 특히 일본에서 인기가 높았던 입생로랑의 타격은 엄청났습니다. 이렇게 브랜드가 어려워지니 경영권이 넘어갑니다. 기성복 라인은 구찌의 케링그룹이, 화장품은 로레알그룹이 운영을 맡게됩니다. 이브 생 로랑은 오뜨 꾸뛰르만 맡게됩니다. 거대 패션그룹의 시대가 온 것이죠.



 

출처 : https://harrison-jo.tistory.com/181

 케링그룹이 경영을 맡으면서 입생로랑은 완벽히 되살아납니다. 170여개의 라이센스 사업을 축소하여 10개 내외로 줄이고, 2012년에는 리브랜딩을 위해 로고까지 교체합니다. 왼쪽의 'YSL 로고'. 일명 '카산드르 로고'는 입생로랑의 시그니처 로고입니다. 이 로고는 이브 생 로랑이 직접 만든것은 아닙니다. '카산드르'라는 필명을 썼떤 '아돌프 장 마리 무롱'이 이브 생 로랑의 부탁을 받아 만든 로고입니다. 우아하고 현대적인 남성의 모습을 형상화 했습니다.

 

 

 지금 대표로 쓰이고 있는 생로랑의 로고는 '에디 슬리먼'이 제안했습니다. 기성복 브랜드 '생로랑 리브고슈'의 이름에서 따온 것입니다. 밀레니얼 트렌드에 맞게 단순한 로고를 디자인 했고, 'SAINT LAURENT' 에서 'NT'를 붙여씀으로서 통일감을 주었습니다. 지금 생로랑은 입생로랑과는 또 다른 브랜드로 나아가고 있습니다.



 

출처 : https://magazinedelledonne.it/faq/34463-i-capolavori-di-yves-saint-laurent

 그렇게 전설적인 디자이너 이브 생 로랑은 2002년 은퇴를 합니다. 고별 패션쇼 피날레에서는 당대 탑모델들이 이브 생 로랑의 상징 '여성 턱시도'를 입고 전설의 은퇴를 배웅합니다. 그리고 그는 은퇴 기자회견에서 모든 여성들에게 감사의 인사를 전합니다.

유명인이든 평범하든
내 옷을 입어준 모든 여성들에게
감사의 인사를 전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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